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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역사

아랍인

by 오제이티 2020. 5. 9.

영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로버트 킬로이 실크는 2003년 선데이 익스프레스에서 아랍인들에게 빚진 것이 없다는 기사를 썼다. 그 기사와 그 저자에 대한 논평은 예상대로 빨랐고, 영국의 무슬림 위원회가 항의 시위를 주도했다. 그 불쾌한 생각들이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사건에서 놀라운 것은 아랍인들에 대한 기사에 대한 반대가 아랍이 아닌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이슬람 교도들이 아랍인이 아닌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랍인들과 이슬람 교도들은 정기적으로 이슬람교의 지지자들과 독재자들에 의해 같은 역할을 한다. 

흥미롭게도, 아주 초기의 이슬람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모순이 전적으로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이슬람교는 아랍인들만을 겨냥한 초개체 종교로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게다가, 우마이 야드 칼리프 제도 하에서, 비아라브를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좌절되었고, 그렇게 개종한 사람들은 아랍 부족의 고객이 되었다. 다시 말해, 이슬람 교도가 되기 위해서는 아랍이거나 최소한 명예로운 사람이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세기 동안 이슬람권의 유대인들은 마호메트가 일신교를 전파하기 위해 신이 보낸 진정한 예언자였으나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교도 아랍인들 사이에서만 그렇다고 주장했다. 코란 자체에 대한 지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사물을 보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며, 확실히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아랍인들과 그들의 문화는 여러 면에서 모든 무슬림들에게 중심이 되어왔다. 코란을 번역하는 오랜 반대와 함께 이슬람교와 아랍인들의 초기 연관성은 심지어 비아랍 이슬람 교도들도 최소한 아랍어의 기본을 배워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비록 대부분의 이슬람 역사학자들이 아담과 이브가 아람틱으로 말했다고 해도 아랍어가 페르시아어로 여겨지는 것은 해가 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이슬람 율법, 신학, 4차 학문, 하디스, 역사 등의 획기적인 저작을 읽고 싶은 사람들은 아랍어에 대한 철저한 기초를 갖추어야 한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매우 제한된 지역과 시기에 이슬람이 널리 퍼지면서, 이슬람 교도들의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종종 포함되었다. 

따라서 아랍어가 아닌 언어도 구어체의 특수성을 수용하기 위해 수정된 아랍어 스크립트 버전으로 작성되었다.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 터키어는 물론이고 많은 다른 언어들도 아랍어 알파벳을 사용하고 많은 아랍어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이슬람 역사의 첫 몇세기 동안 민족에 상관 없이 모든 작가들은 아랍어로 그들의 작품을 작곡할 것이다. 아랍어는 아마도 중국어와 비교될 것입니다. 그 안정성은 수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국 학자들이 이전의 생각을 읽고 발전시킬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공유하는 학문적인 언어로서, 아랍어는 또한 근대 초기 유럽에서 라틴어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학자적 언어로서의 아랍어의 확산은 회교도와 비회교도들이 경계와 세대를 넘어 그들의 생각을 소통하게 해 주었고 많은 분야에서 인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9세기에, 이 고대 그리스 문학의 상당 부분이 만화의 후원으로 아랍어로 번역되었는데, 서양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전통을 즐길 능력을 잃었고,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억지 사상 따라서,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는 아랍인들과 그들의 언어가 아라비아에 남아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물론 아랍인들이 아라비아에 남아 있었다면 이슬람 문명의 탄생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이 극동, 북 아프리카, 이베리아, 중앙 아시아를 정복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랍인들은 우마이 야드와 아바 사이드 제국이 건설된 정치적,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랍과 그 문화가 이슬람에 대한 중요성을 현대적으로 유지해 온 반면, 아랍인들은 어떤 면에서 뒤쳐지고 있다. 알 킨디(1873)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아랍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아랍인이었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철학자로 알려졌다. 10세기 이후부터, 아랍인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차 세계 대전 후, 오스만 제국의 붕괴는 여러 단체들이 국가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몰려들면서, 가까운 동부의 인종과 종교적 요소들의 전반적인 재구성을 목격했다. 비록 공동체 정체성에 대한 추구는 우마마에 대한 개념을 이미 갖춘 통일자에게 제공한 이슬람교에서 시작되었지만, 많은 아랍 지식인들은 기독교인이었으며 이슬람의 정체성보다는 아랍이다. 따라서, 아랍 민족주의와 범 아랍주의는 의식적으로 세속적인 움직임이었다. 나세르의 판아랍 실험 실패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고 게다가 이슬람 이념이 다시 한번 동양에서 아랍 통합을 대체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아랍 중심의 움직임과 이슬람 중심의 움직임 사이의 경계는 때때로 모호해 졌다. 이슬람교의 지도자인 미셸 아블라크(1989년)는 아랍 민족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개인들과 전 국가들은 동시에 다수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흥미롭게도, 이슬람교와 아랍인들은 처음에는 아랍이 되기 위해 분리될 수 없는 존재였지만,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아랍 사상과 이슬람 사상이 동 민족의 직접적인 경쟁이었다. 아랍 세계에서는 이슬람 운동이 우세해 졌지만, 이란 동부에서는 종교와 인종 간 충성 경쟁이 더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