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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역사

페르시아인들

by 오제이티 2020. 5. 9.

아랍과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터키인들은 세계 무대에서 그들의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슬람교 덕분이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렇지 않다. 페르시아인들은 아카메네이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랑스럽고 긴 국가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증가는 아랍인들과 터키인들에게는 완전한 성공이었지만, 일부는 단일 주의와 진정한 종교를 얻었지만 그들의 제국과 독립을 잃은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축복이었다. 비록 초기의 무슬림들이 이전의 비잔틴과 사사니드 땅에 그들의 주를 만들었지만, 사사니즈는 정복당한 비잔틴 민족들이 정복되지 않았던 제국의 일부로 도망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사니드 제국 전체가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정복당했고, 비록 일부 모로코인들은 인도로 피신했지만 페르시아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단기, 중기 그리고 장기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단기적으로 페르시아인들은 아랍 군대에 격렬하게 저항했는데, 이는 일부 지방에서는 이슬람으로의 개종, 아랍 정착, 그리고 아랍인 이주가 피상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페르시아의 정상들은 어느 정도의 권력을 보유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페르시아의 행정적 전통은 그에 따라 지속되었다. 신기하게도, 많은 페르시아인들은 이슬람 정복을 일시적이고 되돌릴 수 있는 일시적인 일시적인 일시적인 일시적인 문제로 여겼고, 다음 2세기 동안 사회적인 지위 회복의 선언과 함께 나타났다. 일부 현대 역사학자들과 일부 관측통들은 그 당시 이슬람 역사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사바시드 혁명과 바그다드의 탄생을 포함한 사르시아드 혁명의 예로 보았다. 사건들에 대한 그러한 해석은 각각의 경우에 부정확하지만 이슬람의 증가가 많은 페르시아인들에게 가져다 준 충격적인 영향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정확하다. 

중기적으로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역전시키기보다는 페르시아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가 고립되었다. 이라크로 이주함으로써 사사니드 제도의 잔해 속에서 권력 기반을 건설한 아바시드 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페르시아 전통에서 물려받은 정치 및 정부 조직일 뿐만 아니라, 문학, 역사, 신학, 종교 과학, 쿠라닉등 대부분의 압바시드문명 책을 아랍어로 배척했지만 잠 잘 때는 페르시아어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들의 문화적 지배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페르시아 문화를 홍보하고 아랍인들에게 그들의 빚을 상기시켜 주는 문학 운동이 일어났다. 이슬람 세계의 서쪽에 글을 쓴 이븐 할두언(1406)조차도 그의 무카디마(아래 105페이지 참조)에 포함되어 있다. 

장기적으로 이슬람 문화 자체는 실현 가능한 대안들 앞에서도 개인화되었다. 이 과정은 아바시드 동부에서 지배자들이 사자니드의 언어를 채택하고 그들의 왕조인 페르시아의 가장 중요한 족보를 추적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아마도 페르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 작품인 '샤나마'는 사마니드 시대에 작곡되었고 가자비드 통치자에게 헌정되었다. 이 책은 전 세계가 탄생한 것부터 시작해, 그리고 긴장감 있게도, 리비아의 알 카에다 전투에서 무슬림이 7명을 패배시킨 것으로 끝나는 모든 이란 역사를 서사적인 형식으로 요약한다. 

무엇보다도, 터키인, 몽골인, 투르코 몽골인들의 이슬람권으로의 확산은 페르시아 문명의 파급 효과를 가져왔는데, 특히 이란 밖에서도 그랬다. 동양으로의 이슬람 전파에 있어 민간어 선교사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중국 이슬람 교도들이 사용하는 종교 용어가 이 말을 아랍어로 바꾼 것은 우연이 아니다. 10세기 후반 이슬람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살주크와 오스만이 후손인 터키 부족은 페르시아에 의해 이슬람교로 개종했고, 따라서 페르시아 체를 통해 종교가 그들에게 정화되었다. 살주케가 이란 이라크에서 왕조를 세웠을 때, 그것의 행정 양식과 문학 형식은 페르시아였고, 그들의 친척들이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오스만 제국을 세우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했을 때, 여기 또한 페르시아 문명을 채택했다. 

몽골과 티무리드 정복자들은 지금까지 파괴적이었으나 페르시아어의 성공에 기여했다. 반면에 정복으로 인한 혼란은 이란 학자들로 하여금 주로 이슬람교의 인도 같은 다른 곳에서 안전과 후원을 찾게 만들었다. 델리(Delia), 특히 무굴(무갈sultans)인도 이슬람 문학, 예술(특히 그림), 제국 행정부는 페르시아어로 되어 있었고 페르시아 문화의 가장 훌륭한 표본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11세기에서 19세기까지 페르시아어는 이슬람 세계를 통틀어 높은 문화의 선두 언어였다. 이후 인도에서 영어, 우르두, 힌두어 등에 의해 빛이 바랬고 터키어, 아랍어 등이 기원전 1273년 이후에도 이 책의 영향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비록 그는 예언자는 아니지만 페르시아 문학은 또한 수많은 다른 서양 작가들 중에서 괴테와 올란도르에서 팬들을 발견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분명히 자랑스러워 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1907년(영국과 러시아의 영향력 영역으로 나뉘어 졌던) 이란에 대한 서구의 간접 지배가 뒤늦게 도래함으로써 이란의 애국심이 결코 약화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이란의 시아파 정체성과 함께 아랍어 확산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저항은 수세기 동안 국가의 독특함을 느끼게 했다. 

이 모든 것의 단점은 세계에서 이란의 위치가 국가적 야망과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합리화는 가끔 이상하고 위험한 곳에서 추구되어 왔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부터 외국의 종교 개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부터, 이란의 위기를 러시아, 영국, 미국, 십자군, 시오네스트, 시오니스트들이 비밀 음모론을 폈습니다. 

CIA가 이란 정부를 전복시킨 1953년 쿠데타를 조직했지만, 하마이니가 영국이나 미국의 요원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이란과 페르시아인들이 정말로 이슬람 문명의 윤곽과 내용에 대해 형성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면에서 그들은 터키인들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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